밀양 박씨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분류
관향 | |
원시조 | |
비조 | |
시조 | 박언침(朴彦忱) |
중시조 | 박언부(朴彦孚), 박언상(朴彦祥), 박언인(朴彦仁), 박양언(朴良彦), 박천익(朴天翊), 박을재(朴乙材), 박원(朴元), 박척(朴陟), 박원광(朴元光), 박중미(朴中美), 박위(朴威), 박현(朴鉉) |
집성촌 | |
인구 | 3,168,084명(2015년) | 국내 2위[1] |
1. 개요 [편집]
2. 역사 [편집]
밀양 박씨[2]를 포함한 모든 박씨는 신라 건국자인 박혁거세의 후손들이다[3]. 한자를 보면 木(목) 점卜(복)의 결합이다, 나무로 점을 친다는 뜻인데, 다른 제정일치 사회와 같이, 고조선의 단군이나 유대교의 아브라함, 이슬람 시조인 무함마드처럼 신라 시대 내내 신라인들의 시조로 숭상되어 왔다. 초창기 신라(서라벌) 6촌 백성들의 지도자이자 제사장으로 선출되었던 것이 그 시작이다. 이후 금척 전설이 내려오고, 김, 석씨 왕들이 혁거세를 시조로 여겨 신궁에서 제사 지낸 것은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왕실에서 주관하여 세종때 경주 숭덕전을 세워 이를 이어왔고, 임진왜란 이후엔 박씨 선비들이, 현재엔 오릉보존회 등의 단체들이 해마다 봄, 가을에 모여 혁거세에 대한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박씨는 신라 초기에 7명, 후기에 3명, 총 10명의 신라왕을 지냈다. 밀양 박씨는 크게 절대다수인 일성왕계와 소수인 파사왕계 중에 일성왕계로 분류되며 경명왕의 제1왕자인 30세 밀성대군 박언침(密城大君 朴彦忱)을 도시조로 한다. 박언침은 밀양, 반남 박씨들의 공동 시조가 된다.
고려 개국 시점에, 밀성대군이 아버지 경명왕으로부터 분봉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밀양과 경주시 일부 등 영남에 기반을 둔 신라계 유력 호족중 하나였고, 밀성대군의 아들 박욱이 기인 제도로 삼한벽상공도대장군으로 고려조정에 출사해 개경에 진출했다,
박욱의 7대손 박언부는 고려의 황금기였던 문종 치세 때 태사중서령을 역임하고 문하시중에 올라 당시 최충 등과 함께 명재상 반열에 올랐다. 이후, 좌복야 박언인, 밀직부사 박양언, 판도판서 박천익, 삼사좌윤 박을재, 도평의사사사 박언상 등등 고려 역사에서 가장 태평성대에 주요 관직에 후손들이 이름을 올림으로써 이름이 있는 문벌귀족이 되었다.
비록, 권신이나 왕비를 배출해 중앙정계에서 강한 권력을 휘두르거나 재상지종가문은 아니였으나, 개경에서 가까운 경기, 패서 일대에 기반을 둔 유력 문벌귀족들에 비해서 결코 떨어지는 집안이 아니었다. 중국인의 관점에서 쓴 송나라 책인 고려도경에 이들이 언급이 될 정도로 영남 기반의 실력이 있는 문벌귀족 집안이였다.
신라 말엽부터 경주 땅은 박씨의 영향력이 강했다 볼 수 있는데, 실제 말기 신라의 영토가 경주 일대로 축소되어 김씨들의 기반이 거의 날아갔는지 이 시점부터 박씨 왕들이 새로 나오기 시작했고, 김현승의 김씨 복위반란으로 경주 안에서 시가전이 일어났지만 박씨인 경명왕이 이를 진압해 지배력을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이 결정적 근거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박씨 왕들의 무덤이 몰려 있는 경주 남산 서쪽면 배동일대에 경애왕릉, 배동 삼릉, 오릉, 박씨의 성지인 나정과 경애왕이 피살당한 제사용 연회공간인 포석정 등 박씨와 역사적 연관성이 높은 유적들이 대거 몰려있는 것으로 보아 이쪽 구역이 박씨와 특별히 연관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대몽항쟁 이후, 고려 정부가 원나라의 식민통치를 받아들여 진도군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밀양 군민들이 고을 부사를 죽이고 청도군까지 세력을 넓힌 후 삼별초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건이 있는데, 이때 밀양 박씨가 그 배후세력의 핵심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당장 드러난 주동자 5명 중 3명이 박씨다(박평, 박공, 계년, 방보, 박경순). 삼별초는 진압되고 이후 밀성은 반역의 땅으로 낙인되어 귀화부곡(歸化部曲), 즉, 천민들이 사는 '부곡'으로 바뀐다.[4] 이후 복권되지만, 군이 현이 되고 다시 군이 되는 등 원간섭기 꽤나 수난을 겪는다. 그런 와중에서도 오히려 밀양 박씨는 권문세족들이 강성하던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며 인재들을 배출했으며, 절묘하게도 반원자주를 국가정책으로 밀었던 공민왕시기에 정점에 달했다.
충렬왕 때 급제한 후 내부시승에 임명된 충헌공 박척, 판전교사사로 봉해지고 원나라로부터 문하찬성사로 증직받은 박원, 전법판서 박천명, 사헌부 규정 박현[5], 대제학 박중미, 박광후, 박윤겸, 공민왕 때 장원급제한 성균관대사성 박의중, 고려군 1만명을 이끌고 왜구의 전초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 박위, 공민왕때 문하시중을 지낸 박득중, 고려 때 호조전서였으나 조선 개국 후 두문동 전설에서 죽었다는 박침, 박침의 아들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참찬의정부사에 제수 되었으며 세종에게 딸을 후궁으로 시집보낸 박강생 등등.
고려말 정국군파 중시조 박위가 대마도를 정벌을 할 때는 군사 1만명과 전함 100척을 동원했는데, 기록상 고려 중앙군이 긴 전란으로 궤멸되고 다른 신흥무인들이 정벌을 주저할 때, 박위와 박천[6] 등 개인 사병들이 주축이 되어 먼저 출항하고 여러 다른 신흥무인들의 합세를 나중에 받은 것으로 보아 당시 밀양 박씨가 고려 내 크고 작은 신흥무인들 사이에서 구심점이 되어 세력을 이룰 정도의 경제, 군사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주목할 만한 점은 정벌 이후 류큐 오키나와 왕국이 고려에 신하가 되려고 특산물 등 조공을 보냈다는 것이다. 조선 개국 이후에도 조공을 바쳤으며 이 시기 부터 조선과 오키나와는 교류하기 시작했고, 낙후되어 있던 오키나와의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임진왜란 이후 규슈 다이묘였던 시마즈 가문의 정복으로 일본 영토가 되기 전까지 200여 년간 교류한다.
고려말 당시에 규슈 지방 토착 봉건 영주들이 정벌 얼마 후 사신을 보내 고려에 저자세를 취하며 접근해왔으며 1390년엔 규슈절도사가 조공을 바쳤던 기록이 있고, 1391년엔 규슈에서 고려인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등 성과들을 거두었다. 이들은 일본 남조 잔여세력으로 규슈는 고려 말 왜구의 발흥과 직접 연관있는 아지트였다. 이들은 꽤나 무장한 정규군이면서도 교토 인근까지도 약탈하는 등 자국내에서도 상당히 악명 높은 해적이었는데, 일단 머리를 숙여온 것이다. 이 시기 대마도 정벌은 확실히 밀양 박씨의 공이 크다.
고려말 규정공파 박현의 후손들이 조선조에 유학에서 두각을 드러내면서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고 현재 각파별 인구면에서도 가장 많다.
밀양 박씨는 조선 개국 이후 518년 통틀어 문과 급제자가 261명, 무과 급제자 1125명, 상신(相臣) 1명, 대제학(大提學, 문형) 2명, 청백리(淸白吏) 2명, 공신 6명, 생원진사 756명을 배출하는 물량전을 선보였다.
밀양 박씨는 260명을 넘는 문과 급제자 숫자에 비해 정승이 광해군 때 숙민공 박승종(영의정)[7] 한 명이다.
경주 이씨와 마찬가지로 집성촌은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포진하고 있다[8]. 여기서 추가하면, 부산광역시나 전라남도 여수시, 목포시, 전라북도 군산시 근처로 갈수록 전체 인구에서 밀양 박씨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다. # 이것은 전주 이씨나 경주 김씨처럼 이북 지역에 인구와 집성촌이 많은 것과 대조된다.
두산그룹 일가[9]와 포스코의 창업자인 박태준이 밀양 박씨이다. 포브스 세계 부자순위 500위에 올랐던 태광실업의 박연차 회장도 밀양박씨이다.
이곳에 의하면 한반도 거의 전지역에 집성촌을 두고있는것으로 보인다.
박씨는 신라 초기에 7명, 후기에 3명, 총 10명의 신라왕을 지냈다. 밀양 박씨는 크게 절대다수인 일성왕계와 소수인 파사왕계 중에 일성왕계로 분류되며 경명왕의 제1왕자인 30세 밀성대군 박언침(密城大君 朴彦忱)을 도시조로 한다. 박언침은 밀양, 반남 박씨들의 공동 시조가 된다.
고려 개국 시점에, 밀성대군이 아버지 경명왕으로부터 분봉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밀양과 경주시 일부 등 영남에 기반을 둔 신라계 유력 호족중 하나였고, 밀성대군의 아들 박욱이 기인 제도로 삼한벽상공도대장군으로 고려조정에 출사해 개경에 진출했다,
박욱의 7대손 박언부는 고려의 황금기였던 문종 치세 때 태사중서령을 역임하고 문하시중에 올라 당시 최충 등과 함께 명재상 반열에 올랐다. 이후, 좌복야 박언인, 밀직부사 박양언, 판도판서 박천익, 삼사좌윤 박을재, 도평의사사사 박언상 등등 고려 역사에서 가장 태평성대에 주요 관직에 후손들이 이름을 올림으로써 이름이 있는 문벌귀족이 되었다.
비록, 권신이나 왕비를 배출해 중앙정계에서 강한 권력을 휘두르거나 재상지종가문은 아니였으나, 개경에서 가까운 경기, 패서 일대에 기반을 둔 유력 문벌귀족들에 비해서 결코 떨어지는 집안이 아니었다. 중국인의 관점에서 쓴 송나라 책인 고려도경에 이들이 언급이 될 정도로 영남 기반의 실력이 있는 문벌귀족 집안이였다.
신라 말엽부터 경주 땅은 박씨의 영향력이 강했다 볼 수 있는데, 실제 말기 신라의 영토가 경주 일대로 축소되어 김씨들의 기반이 거의 날아갔는지 이 시점부터 박씨 왕들이 새로 나오기 시작했고, 김현승의 김씨 복위반란으로 경주 안에서 시가전이 일어났지만 박씨인 경명왕이 이를 진압해 지배력을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이 결정적 근거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박씨 왕들의 무덤이 몰려 있는 경주 남산 서쪽면 배동일대에 경애왕릉, 배동 삼릉, 오릉, 박씨의 성지인 나정과 경애왕이 피살당한 제사용 연회공간인 포석정 등 박씨와 역사적 연관성이 높은 유적들이 대거 몰려있는 것으로 보아 이쪽 구역이 박씨와 특별히 연관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대몽항쟁 이후, 고려 정부가 원나라의 식민통치를 받아들여 진도군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밀양 군민들이 고을 부사를 죽이고 청도군까지 세력을 넓힌 후 삼별초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건이 있는데, 이때 밀양 박씨가 그 배후세력의 핵심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당장 드러난 주동자 5명 중 3명이 박씨다(박평, 박공, 계년, 방보, 박경순). 삼별초는 진압되고 이후 밀성은 반역의 땅으로 낙인되어 귀화부곡(歸化部曲), 즉, 천민들이 사는 '부곡'으로 바뀐다.[4] 이후 복권되지만, 군이 현이 되고 다시 군이 되는 등 원간섭기 꽤나 수난을 겪는다. 그런 와중에서도 오히려 밀양 박씨는 권문세족들이 강성하던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며 인재들을 배출했으며, 절묘하게도 반원자주를 국가정책으로 밀었던 공민왕시기에 정점에 달했다.
충렬왕 때 급제한 후 내부시승에 임명된 충헌공 박척, 판전교사사로 봉해지고 원나라로부터 문하찬성사로 증직받은 박원, 전법판서 박천명, 사헌부 규정 박현[5], 대제학 박중미, 박광후, 박윤겸, 공민왕 때 장원급제한 성균관대사성 박의중, 고려군 1만명을 이끌고 왜구의 전초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 박위, 공민왕때 문하시중을 지낸 박득중, 고려 때 호조전서였으나 조선 개국 후 두문동 전설에서 죽었다는 박침, 박침의 아들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참찬의정부사에 제수 되었으며 세종에게 딸을 후궁으로 시집보낸 박강생 등등.
고려말 정국군파 중시조 박위가 대마도를 정벌을 할 때는 군사 1만명과 전함 100척을 동원했는데, 기록상 고려 중앙군이 긴 전란으로 궤멸되고 다른 신흥무인들이 정벌을 주저할 때, 박위와 박천[6] 등 개인 사병들이 주축이 되어 먼저 출항하고 여러 다른 신흥무인들의 합세를 나중에 받은 것으로 보아 당시 밀양 박씨가 고려 내 크고 작은 신흥무인들 사이에서 구심점이 되어 세력을 이룰 정도의 경제, 군사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주목할 만한 점은 정벌 이후 류큐 오키나와 왕국이 고려에 신하가 되려고 특산물 등 조공을 보냈다는 것이다. 조선 개국 이후에도 조공을 바쳤으며 이 시기 부터 조선과 오키나와는 교류하기 시작했고, 낙후되어 있던 오키나와의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임진왜란 이후 규슈 다이묘였던 시마즈 가문의 정복으로 일본 영토가 되기 전까지 200여 년간 교류한다.
고려말 당시에 규슈 지방 토착 봉건 영주들이 정벌 얼마 후 사신을 보내 고려에 저자세를 취하며 접근해왔으며 1390년엔 규슈절도사가 조공을 바쳤던 기록이 있고, 1391년엔 규슈에서 고려인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등 성과들을 거두었다. 이들은 일본 남조 잔여세력으로 규슈는 고려 말 왜구의 발흥과 직접 연관있는 아지트였다. 이들은 꽤나 무장한 정규군이면서도 교토 인근까지도 약탈하는 등 자국내에서도 상당히 악명 높은 해적이었는데, 일단 머리를 숙여온 것이다. 이 시기 대마도 정벌은 확실히 밀양 박씨의 공이 크다.
고려말 규정공파 박현의 후손들이 조선조에 유학에서 두각을 드러내면서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고 현재 각파별 인구면에서도 가장 많다.
밀양 박씨는 조선 개국 이후 518년 통틀어 문과 급제자가 261명, 무과 급제자 1125명, 상신(相臣) 1명, 대제학(大提學, 문형) 2명, 청백리(淸白吏) 2명, 공신 6명, 생원진사 756명을 배출하는 물량전을 선보였다.
밀양 박씨는 260명을 넘는 문과 급제자 숫자에 비해 정승이 광해군 때 숙민공 박승종(영의정)[7] 한 명이다.
경주 이씨와 마찬가지로 집성촌은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포진하고 있다[8]. 여기서 추가하면, 부산광역시나 전라남도 여수시, 목포시, 전라북도 군산시 근처로 갈수록 전체 인구에서 밀양 박씨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다. # 이것은 전주 이씨나 경주 김씨처럼 이북 지역에 인구와 집성촌이 많은 것과 대조된다.
두산그룹 일가[9]와 포스코의 창업자인 박태준이 밀양 박씨이다. 포브스 세계 부자순위 500위에 올랐던 태광실업의 박연차 회장도 밀양박씨이다.
이곳에 의하면 한반도 거의 전지역에 집성촌을 두고있는것으로 보인다.
3. 항렬 [편집]
항렬의 폭이 굉장히 넓은 밀양 박씨의 경우 동 연령대지만 항렬이 10세손 이상 차이나는 경우가 의외로 흔하다. 동 연령대에서 복야공파나 은산군파에 속하는 사람은 규정공파나 양산군파에 속하는 사람에 비해 항렬이 훨씬 높다. 복야공파나 은산군파 계열은 현재 시조 61~64세손에 포진해 있는데, 규정공파 기준 해당 항렬이면 최소 조선 정조 시대까지 올라가야 한다.
3.1. 밀직 부원군파 [편집]
3.2. 규정공파 [편집]
68세 | 노(魯)○, 성(性)○, 병(炳)○, 희(熙)○ |
69세 | ○규(圭), ○신(信), ○재(在) |
70세 | 종(鍾)○, 상(商)○, 용(鏞)○ |
71세 | ○순(淳), ○수(洙), ○호(浩), ○원(源) |
72세 | 상(相)○, 주(柱)○, 인(仁)○ |
73세 | ○열(烈), ○용(容), ○희(熙) |
74세 | 중(重)○, 시(時)○, 준(埈)○ |
3.3. 판서공 밀양공파 [편집]
67세 | 수(壽)○, ○희(羲), 상(尙)○, 기(基)○ |
68세 | 선(善)○, ○현(鉉), 석(錫)○, ○한(漢) |
69세 | 영(永)○, ○수(洙), 택(澤)○, 주(柱)○ |
70세 | 식(植)○, 근(根)○, 환(桓)○, ○연(然) |
71세 | 엽(燁)○, 유(裕)○, 변(變)○, 훈(勳)○ |
72세 | 희(喜)○, ○곤(坤), 재(宰)○, 길(吉)○ |
밀양 박씨는 모든 지역에 골고루 잘 분포해있지만 밀양공파는 주로 경상남도와 전라도 지역에 비교적으로 많이 분포한다. 판서공파의 유명인은 탤런트 박근형과 가수 영탁,
세종 때 아악을 편찬했던 박연(호 난계)은 단순히 음악가로만의 인물이 아니며,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던, 조선 초기문신이다. 또한 박연은 판서공 밀양공파가 아니고, 고려시대 좌복야 벼슬을 했던 박언인의 후손이므로 좌복야공파의 인물이다. 조부 박시용(고려 때 대제학을 지냈다.)이 고려 후기에 본거지인 밀양을 떠나, 처가인 충북 영동에서[11] 세거하게 되었는데, 박시용의 손자인 박연, 박흥생, 박재현, 박흥거에서 좌복야공파가 각각 난계공파, 국당공파, 이요당공파로 다시 분파된다.
4. 주요 인물 유명인 [편집]
박씨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웬만해서는 밀양 박씨지만, 간혹 아닌 경우도 있다. 박정희, 박근혜 전 대통령은 고령 박씨, 전 메이저리거 박찬호, 방송인 박경림, 박현주 미래에셋회장 등은 충주 박씨, 정치인 박영선, 소설가 박완서, 배우 박신양, 박보검, 전직 프로게이머 박용욱과 박태민, 영화 감독 박찬욱 및 박찬법 금호아시아나그룹 제 5대 회장은 반남 박씨[12], 야구선수 박재홍과 영화배우 박시후는 함양 박씨, f(x)의 루나와 가수 박지윤은 죽산 박씨, 탤런트 박은빈, 배우 박재정, 법정 스님은 순천 박씨이다. 또한 프로골퍼 박세리는 경주 박씨라고 본인이 밝혔다.
- 박시운-호계 선도대장
- 박경: 가수
- 박경리: 소설가
- 박동진: 국악인
- 박동희(야구선수): 야구선수
- 박리나: 성우
- 박미선: 개그우먼
- 박범계: 정치인, 변호사
- 박범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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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병선: 배우
- 박병호: 야구선수
- 박상경: 성우
- 박상면(배우): 배우
- 박선영(1956): 언론인, 교육자, 정치인
- 박수진: 슈가 前 멤버
- 잠뜰 : 본명 박슬기. 인터넷 방송인
- 박승태 : 몸값이 엄청난 전설의 축구선수
- 박신혜: 배우
- 박연: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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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하: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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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룬레이-대한민국의 인터넷 방송인.
- 박홍은-대한민국의 유소년야구선수
[1] 광주광역시와 대전광역시의 인구를 합친 것과 비슷하다.[2] 함양 박씨, 순천 박씨, 반남 박씨, 고령 박씨, 영해 박씨 등을 비롯한 모든 박씨들은 박혁거세의 후손이다. 네덜란드에서 귀화한 박연이 귀화한 것은 박씨 본관이 이미 모두 생긴 뒤였다.[3] 사실 이분이 오래 전의 인물인 만큼 모든 박씨는 이분과 어떻게든 피가 섞였을 것이다.[4] 참고로 고려시대 행정체계는 부, 군, 현, 향, 부곡, 소 순으로 내려간다.[5] 조선조 밀양 박씨 최다 문과급제자를 배출한 규정공파 중시조.[6] 구산 박씨의 시조.[7] 박승종은 선조 때 조정에 출사해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호종했다. 왜란 후 병조판서에 올라 문란해진 군적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등 그 능력을 증명했다. 붕당은 동인(소북) 소속으로서 밀창부원군이라는 군호(君號)도 받는 등 이이첨, 류희분과 함께 광해군의 삼창(三昌)이라 불릴 정도의 최측근이었다. 손녀는 광해군의 세자빈(며느리)였고 우, 좌, 영의정을 모두 지냈으나 인조반정 당일 전세가 기울자 경기감사였던 장남 박자흥과 함께 자결한다. 둘째 박자응은 유배 후 풀려나 후사를 이었고 이들이 규정공파에서 분적한 정승공파다.[8] 절묘하게도 20대 국회에는 강원도를 지역구로 두는 국회의원 중에는 밀양 박씨는 고사하고 박씨가 1명도 없다(...) 전남에는 두 명이나 있는데(...)[9] 항렬자를 대조해 보니 양산군파. 박승직의 부친 이름이 박문회인데, 會자 항렬은 양산군파 21세손(혁거세 62세손)에 있다. 박승직은 혁거세 63세손, 박정원 회장은 혁거세 66세손이다.[10] 개그맨 박휘순은 현대 한국남성에게 흔치 않은 '순'이란 글자 때문에 종종 같은 향렬로 오해받는데 모 프로그램에서 자신은 상주 박씨라고 밝힌 바 있다.[11] 그래서 영동군과 그 인근인 충청남도 금산군, 경상북도 김천시에는 밀양박씨 좌복야공파 집성촌이 많다. 사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아들이 처가에 들어가 살고 딸과 사위가 부모의 집을 물려받는 경우가 대다수였다.[12] 금호아시아나그룹 및 금호석유화학그룹 등 범 금호가는 밀양 박씨 집안이다. 박찬법 전 회장은 일반 사원 출신으로, 금호일가와 친인척 관계나 학연이 전혀 닿지 않는다. 앞전에 반대로 기재된 기록이 있어 정정하였다.[13] 판서공 밀양공파 29세손, 혁거세 70세손.[14] 규정공파 24세손, 혁거세 68세손.[15] 규정공파 27세손, 혁거세 71세손.[16] 규정공파 25세손, 혁거세 69세손.[17] 규정공파 25세손, 혁거세 69세손.[18] 규정공파 28세손, 혁거세 72세손.[19] 규정공파 28세손, 혁거세 72세손.[20] 규정공파 28세손, 혁거세 72세손.[21] 규정공파 28세손, 혁거세 72세손.[22] 본명 박상현, 규정공파 28세손, 혁거세 72세손.[23] 본명 박상태, 규정공파 28세손, 혁거세 72세손.[24] 규정공파 25세손, 혁거세 69세손.[25] 규정공파 27세손, 혁거세 71세손.[26] 규정공파 25세손, 혁거세 69세손. 순풍산부인과에서 이를 비튼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규정공파 후손인줄 알았더니 사실은 근본도 없는 집안이라는 반전.[27] 본명이 박영환이다.[28] 판서공 밀양공파 30세손, 혁거세 71세손.[29] 박유천 마약 투약 사건으로 인해 소속사에서 잘리면서 현재는 JYJ를 탈퇴.[30] 박노식의 아들 - 규정공파 25세손, 혁거세 69세손.[31] 규정공파 30세손, 혁거세 74세손.[32] 박용호 전 아나운서의 아들[33] 규정공파 27세손, 혁거세 71세손.[34] 규정공파 28세손, 혁거세 72세손.[35] 본명 박병철[36] 본명 박정수, 규정공파 27세손, 혁거세 71세손.[37] 본명 박충재[38] 본명 박수영[39] 본명 박영탁[40] 본명 박찬열[41] 본명 박민규[42] 본명 박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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